도일 조각전-모심과 섬김을 통한 령(靈)적 소통<윤여건>
모심과 섬김을 통한 령靈적 소통
윤여건 시인
조각가 도일과 만난 지 벌써 십년, 이젠 둘 다 사십대 중앙선을 가로지르는 나이다. 작가는 지금 용인에 작업장을 두고 있지만 충남 연산에서 작업하실 때에는 시간이 멀다하고 자주 만났다. 버스를 타고 언덕을 넘어 정류장에 내리면 나는 청주와 삼겹살을 사서 산기슭을 올랐다. 비닐하우스로 된 천막 작업장 앞에 다다르면 문간에서 “왔어? 어서 들어와!”하며 진심어린 마음으로 반겨주었다. 톱밥 냄새가 훅 끼치는 천막에 들어서면 탁자 위에 놓인 녹차로 목을 축이게 하고 연산 순대로 배를 채우게 했다. 손님을 맞는 작가의 태도는 참으로 경건했다. 그것은 허투루 사람을 만나지는 않지만 정말 그리운 사람을 만나면 지극한 성심을 다하는 작가의 선비적 기질 때문이었을 것이다. 밤은 깊어가고 술병도 비워 갔지만 산의 생명들이 내는 숨소리 때문인지 우리는 쉬이 쓰러지지 않았다. 언젠가는 작가도 취기가 발동했는지 일 미터가 넘는 탁자 위로 올라가 술을 마셔야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취하기 마련, 결국 필자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몇 군데 찢긴 것 말고는 아무 탈이 없었지만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작가의 도인 같은 기질을 욕할 수밖에…….
조각가 도일은 당시 「당위當爲」라는 모임을 이끌고 있었다. 대전에서는 꽤 유명했던지 전시회를 열면 많은 대학생들이 관람하고 신문에도 기사화 되곤 했다. 시를 쓰는 필자로서는 미술 분야와 거리감이 있었던 까닭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 결국 작가의 권유로 농사짓는 지인과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갤러리에서 설치전도 열고 무가지인 「당위지當爲誌」를 발간하면서 필자는 조각가 도일이 생각하는 예술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간間’ 속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이었다. 설치작업 준비로 힘들어 하고 있을 때 작가는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미술에 대한 역량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너와 나 기우뚱한 수평관계를 유지하면서 한 계단, 한 계단 함께 올라갈 수만 있다면 그것이 예술이지 다른 게 예술이 아니야.”
그런데 작가의 소통에는 특이하게 ‘령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작가의 작품 중에 ‘그것은 한 몸으로 번져간 령靈이었다.’라는 목조작품이 있었는데 작가는 번데기의 주름에 주목하고 그것을 생명의 굴곡을 넘어온 역동성, 령靈의 흔적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다. 여기서 ‘령靈’은 모든 만물에 깃든 것이기에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가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소통은 인간을 넘어서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령靈적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그러므로 소통은 대상에 대한 모심과 섬김을 회전축으로 하여 다양한 생명체가 바퀴살이 되어 함께 돌아가는 바퀴라고도 볼 수 있다. 결국 조각가 도일에게 있어서 소통은 인간이 범해왔던 파괴적 행위에 대한 거부이며 이를 정화하고자 하는 예술적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Beyond the line', 이 번 전시의 큰 주제이다.
선을 넘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선이 대립과 단절을 의미한다면 선을 넘는 행위는 조화요, 소통일 것이다. 잘려진 젓가락, 숟가락들은 어찌 보면 상처 입은 존재인데 이것들이 그물처럼 이어져 새가 되기도 하고 파도가 되기도 하고 꽃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밖의 통 살이 이어져 그 속에 또 다른 통이 만들어지는 것은 결국 안과 밖의 경계 허물기에 해당한다. ‘간間’을 통한 소통의 모습이 이번 작품에 와서 더욱 다양해지고 조형적으로 완성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현재가 아니라 미래가 평가해 줄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한 작가의 말처럼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일보일배一步一拜 경건의 밧줄을 타고 오른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실천적 행위만으로도 값진 일이라 생각한다.